나는 지금까지 일하면서, 지난 2025년만큼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결과물을 낸 적이 없다. 동시에 2025년만큼 빠르게 지친 적도 없다. 두 이유 다 AI 때문이다.
나는 지금 데이터사이언티스트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직책만 데싸이고, 사실상 PM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업 실무자 분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업무 효율화 향상을 위한 AI 시스템 개발, AI 문화 확산 등 흔히 말하는 AX(AI Transformation) 업무를 하고 있다. 생성형 AI가 업무 전반에 들어온 이후, 확실히 개발 작업의 속도는 빨라졌다. 코드를 짜는 시간, 문서를 정리하는 시간, 쿼리를 작성하는 시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줄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가 끝나면 예전보다 훨씬 더 피곤했다. 어떤 날은 번아웃처럼 찾아왔고, 어떤 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내가 체력이 떨어졌나 싶었다. 수면이 부족한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하지만 곧 그 피로의 뿌리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지치지?' 에서 시작된 질문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나에게 일의 가치는 무엇인가?', '데이터사이언티스트로서 나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까지 번져나갔다.
이번 설 연휴에 모든 SNS를 껐다. 알림도 다 꺼두고, 틈틈이 이 생각을 계속했다. 이 글은 그 시간 동안 정리한 것들이다. 영어로는 AI Fatigue라고 하는 주제이다. 대단한 결론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라도 생각의 정리는 필요해서 작성해본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조그만한 인사이트라도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AI가 일을 줄여주지 않았다
AI가 개별 작업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건 사실이다. 이미 AI를 쓰시는 분들을 알 것이다. 예전에 2~3일이 걸리던 일이 1~2 시간 안에 끝난다. 분석 코드를 잡는 것, 보고서 초안을 쓰는 것, 익숙하지 않은 라이브러리의 사용법을 파악하는 것 등이 매우 쉬워졌고 분명히 빨라졌다.
그런데 하루가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 가지 작업이 빨리 끝나니까, 그 시간에 다른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에 평균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일과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는, 개발과 연구에만 집중했던 기존과 다르게 이제는 사용자 시나리오 정의, 서비스 기획, 현장 인터뷰 내용 정리 등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내 처리 용량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니까,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일의 양도 늘어났다. 나 스스로도, 주변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기준선이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선이 계속 올라간다. 특히, 내 스스로 그 기준선을 계속 올렸다. 그만큼 계속 되었으니까.

이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다른 곳들도 있는가?를 보다보니 2026년 2월, UC 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연구팀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한 연구(https://hbr.org/2026/02/ai-doesnt-reduce-work-it-intensifies-it)가 보였다. 연구팀은 미국의 한 200명 규모 테크 기업에 8개월 동안 상주하면서, AI 도구를 자발적으로 도입한 직원들의 업무 변화를 관찰했다. 결과를 보면 AI는 업무를 줄이지 않았고 업무를 강화했다. 직원들은 더 빠르게 일했고, 더 넓은 범위의 작업을 맡았으며, 종종 자발적으로 근무 시간을 늘렸다. 연구팀은 이 현상을 "업무량 서행 증가(workload creep)"라고 불렀다. 작업 하나하나는 분명 빨라졌지만, 절약된 시간은 휴식이나 깊은 사고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간은 곧바로 다른 일로 채워졌다.
이것이 내 스스로 잘 인지 못했던 영역인 것 같다. AI는 생산의 비용은 낮추지만, 조율과 검토와 의사결정의 비용은 높인다. 그리고 그 비용은 전부 사람의 몫이다. 거기서 피로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
작업 전환을 위한 비용과 피로
예전에는 하루에 많아도 세 개 정도의 문제를 붙잡았다. 데이터 파이프라인 설계를 한다면, 오전에 구조를 그리고 오후에 구현하면서 하루가 갔다. 문제의 개수가 있어도, 전반적인 컨텍스트는 유지가 되었다. 머릿속이 하나의 맥락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집중이라는 게 가능한 구조였다. 물론 PM의 역할을 수행할 때는 하루종일 미팅을 했었지만, 그럼에도 그 맥락은 유지되고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A 작업을 하다가 AI로 코드를 빠르게 짜고, 그 사이에 B 작업의 이슈가 들어오면 거기로 넘어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C 작업의 현업 미팅에 들어간다. 하나하나는 "금방"이다. AI 덕분에 각각 한 시간이면 어느 정도 진전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A라는 프로젝트에서 AI 코드를 구성한 다음, A라는 서비스의 예상 되는 사용자 시나리오도 그려보고, 현장 실무자 분들과 인터뷰할 내용도 구상하고, 다시 코드 작업으로 돌아가고, 데이터베이스 설계해보고 등등 계속 작업에 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게 프로젝트마다 돌아가니, 만약 세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면 꽤나 많은 작업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러 책과 지인들과 이야기 해보니까, 인지과학에서 이미 밝힌 사실이 있다고 한다. 멀티태스킹은 실제로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게 아니라, 뇌가 작업 사이를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전환에는 비용이 든다. 집중력이 깎이고,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간다. 작업 전환이 잦을수록 생산성은 떨어지고 피로는 누적된다. 문제는 AI는 지치지 않는다. 문제와 문제 사이에서 리셋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AI와 다르게 체력이 소진된다. 그 간극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으로 찾아온다.
AI로 코드를 빠르게 만들 수 있으니 실질적인 "생산" 시간은 줄었지만, 그 결과물을 현업 실무자와 맞추고, 방향성을 조율하고, 리뷰하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속도가 빨라진 만큼 그 과정이 더 자주, 더 빠르게 반복됐다.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결과물도 빠르게 진척이 되니까. 그럼에도 피로가 누적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만드는 사람에서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다
데이터사이언티스트로서 불과 몇 년전에는 데이터를 탐색하고, 패턴을 발견하고, 모델을 설계하고, 그 결과가 실제 비즈니스에 영향을 주는 걸 보는 그 과정에서 몰입이 있었고, 성장이 있었다.
그런데 AI가 일상에 들어온 뒤, 내 역할의 무게중심이 미묘하게 옮겨갔다. 직접 코드를 짜는 시간보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읽고 평가하고 수정하는 시간이 늘었다. 프롬프트를 작성하고, 출력물을 확인하고, 맞는지 판단하고, 사용자 시나리오에 맞는지 검토하고, 기획서에 맞는지 검토하고, 아키텍처에 부합하는지 검토하고, 틀린 부분을 고치고, 다시 프롬프트를 다듬고. 이걸 반복하는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거 자체가 에너지를 쓰는(뺏기는) 상태라고 한다. 생성적 작업과 평가적 작업의 차이라고 하더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에너지를 준다고 한다. 몰입 상태에 빠질 수 있고,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반면, 남이 만든 것을 판단하는 일은 에너지를 뺏는다고 한다. 결정 피로가 쌓이고, 작은 판단 하나하나가 인지 자원을 소모한다.
Quantum Workplace의 조사(https://www.quantumworkplace.com/employee-engagement-trends-report/employee-experience)에 따르면, AI를 자주 사용하는 직원들은 그렇지 않은 직원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번아웃을 보고했다. AI를 자주 사용하는 그룹의 번아웃 비율이 45퍼센트인 데 반해, 가끔 사용하는 그룹은 38퍼센트,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그룹은 35퍼센트였다. AI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장 먼저 지치고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수 많은 사고와 여러 판단 등으로 인해 뇌가 꽉 차 있었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작은 판단들이 나를 소진시켰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이라는 또 다른 피로
AI 기술 시장의 변화 속도 자체가 피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에 이사를 하면서 대략 한 달 동안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했다. 당장 지난주의 일이다. 26년 1월 말부터 2월 말까지 단 한 달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보니, 새로운 에이전트 프레임워크가 나와 있고, 주요 모델이 업데이트되어 있고, 새로운 이슈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굉장히 소식이 빠르고 업데이트가 빠르다. 농담으로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 '누가 보면 한 3개월 쉰 줄 알겠어'라고 말도 했었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AI 모델만 해도 계속 바뀌고 무엇인가 등장하고 주목받고 대체되는 걸 반복했다. 코딩 어시스턴트도 마찬가지다. 이번 달에 세팅해둔 환경이 다음 달이면 구식이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내가 구성해둔 프롬프트 방법, 일을 처리하던 워크플로우, 사용하던 도구들이 모델 업데이트나 새로운 best practice의 등장과 함께 틀어지기도 했다. 정작 내가 만드는 시스템이나 서비스의 업데이트보다, 나 자신의 작업 환경을 업데이트하는 빈도가 더 높았던 것 같다.
뒤처질까 봐 두려웠다. 매번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따라가려고 했다. 주말에 새로운 도구를 설정하고, 다음 주에 또 다른 도구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 주말에 다시 새로운 걸 시도했다. 이번 설 명절도 그랬다.
지식의 감가상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공들여 만든 프롬프트 체계가 모델 업데이트 한 번으로 변경이 필요해지고, 정성 들여 구축한 워크플로우가 새로운 기능의 등장으로 틀어지는 경험. 그 시간은 투자가 아니라 소비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때의 허탈함.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더 피로감이 쌓였던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기술 속도를 팔로우하는 것은 즐겁기도 하다 ㅎㅎㅎ!
내가 선택한 방향들
이 모든 것을 인지한 뒤, 몇 가지를 바꿨다.
우선, 새로운 것은 팔로우만 한다. 굳이 그걸 직접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정의이지, 기술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레임워크가 아무리 훌륭해도, 내가 풀어야 할 아젠다에서 효과적으로 동작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AI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으로서 트렌드는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AI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노트와 펜을 들고 아키텍처를 그린다. 현업 분들과 이야기 한 것을 바탕으로 사용자 시나리오를 손으로 정리한다. 데이터 파이프라인이나 사용자의 플로우를 종이 위에 정리해보고 그려본다. 비효율적이다. 분명 AI에게 시키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 1~2시간 정도의 비효율이 내 스스로의 사고력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한 시간이라도 직접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날은, 이후 AI의 출력물을 평가할 때도 감각이 더 살아나는 것 같다.

또한, 책을 읽는 시간을 늘렸다. 기술서만이 아니다. 사실 이제 기술서는 되도록 안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대신 기획, 스토리텔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이유가 있다. AI 시대에 데이터사이언티스트의 가치는 코드를 빠르게 짜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의하고,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능력 그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개발자로서의 모습을 조금씩 내려놓고, 기획과 PM의 관점, 스토리텔링과 시나리오 설계,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전 회사에서부터 지금까지 2~3년째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솔직히 잘 안 된다. 그래도 꾸준히 하고 있다.
AI는 내가 지금까지 사용해본 도구 중 가장 강력하다. 동시에 가장 소모적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다. 이 시대에 잘 살아남을 사람은 AI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가장 현명하게 쓰는 사람일 것이다.
도구는 새롭고, 패턴은 아직 형성 중이고, 업계는 더 많은 산출물이 곧 더 많은 가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지속 가능한 산출물이 가치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정답인 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 주제에 관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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